[정보] 포기할 수 없는 화학물질, 차라리 친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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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스러운 화학물질
화학물질 때문에 끔찍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84년 인도의 보팔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가 역사상 최악이었다. 아이소사이안산 메틸이라는 낯선 화학물질이 3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 사고가 먼 나라의 화학공장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믿었던 ‘가습기 살균제’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혹한 일도 있었다.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같은 생소한 이름의 살균 성분이 문제였다. ‘어린이에게도 안전한 살균제’라는 엉터리 광고에 우리 모두가 무려 18년 동안이나 감쪽같이 속아버렸다.
현대 화학으로 합성한 인공 합성물질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자연이 우리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라는 인식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자연에도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독버섯에 들어있는 무스카린, 야생 감자에 들어있는 솔라닌, 복어에 들어있는 테트로도톡신, 오염된 발효식품에 들어있는 아프라톡신과 바이오제닉 아민이 모두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다. 깊은 산속의 깨끗한 옹달샘의 물도 함부로 믿을 수 없다. 인체에 해로운 방사성 천연 우라늄이 녹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암을 일으키는 라돈이 방출된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라돈 침대도 천연 모나자이트로 만든 것이었다.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는 화학물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연료로 사용하는 화학물질 때문에 대형 화재·폭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깨끗한 청정연료라는 수소가 터져서 사람이 죽은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인체에 아무 독성도 없는 질소와 이산화탄소가 작업자들의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음식·물·공기에 들어있는 극미량의 화학물질이 건강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밀가루·땅콩·복숭아·게·새우·달걀을 절대 먹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글루텐과 같은 단백질에 의한 알레르기 때문이다.
화학물질과 친해지기
일상생활에서 화학물질을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숨 쉬는 공기도 화학물질이고, 옷을 염색하는 염료와 건물에 사용하는 접착제도 화학물질이다. 우주 만물이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화학물질이고, 광활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성간 먼지도 화학물질이다. 사람의 몸도 예외가 아니다. 화학물질이 없는 세상에서는 우리 자신도 존재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름이 붙여진 화학물질의 수는 1억 5천만 종이 넘는다. 화학자들도 그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화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화학물질의 이름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름이 낯설다고 공연히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무작정 환상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저 그동안 가까이 지낼 이유가 없었던 먼 나라의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난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화학물질의 독성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사실 독성 물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화학물질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화학물질의 독성을 이용해서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전통의학에서는 맹독성의 비상(삼산화 비소)도 약으로 사용한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의약품은 대부분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다. 약을 반드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사가 조제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독성 화학물질의 정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피해를 예방하거나 해독하는 방법을 알아두면 될 일이다.
화학물질에 대한 지나치게 화려한 주장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 무슨 병이든지 깨끗하게 고쳐준다는 만병통치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에 따르면, 만병통치약은 실제로 아무 병도 고칠 수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21세기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 시골 장터 약장수의 왁자지껄한 노랫가락 수준의 주장에 현혹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음식과 약은 뿌리가 같다’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을 외치는 전문가도 경계해야 한다. 식품표시광고법과 건강기능식품법에서는 식품·건강기능식품을 질병 치료에 사용하는 의약품과 분명하게 구분한다. 식약동원은 현행법에 명백하게 어긋나는 불법적 주장이다.
그런데 음식의 화학적 성분을 들먹이는 엉터리 전문가들이 차고 넘친다. 크릴새우에서 추출한 인지질이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남극에 서식하는 고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부의 레시틴, 바지락의 베타인, 양파의 케르시틴에 대한 주장도 대부분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엉터리다. 현대 과학에서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설픈 세포·동물 실험의 결과를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편과 인터넷에 단골로 등장하는 쇼닥터와 엉터리 전문가들의 화려한 주장은 절대 믿을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세균과 바이러스를 한꺼번에 없애주면서도 인체에는 기적처럼 피해를 주지 않는 살균제를 개발했다는 주장도 믿을 이유가 없다. 가습기 살균제의 아픈 경험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살균제라면 인체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우리의 건강은 지키면서 세균·바이러스·곰팡이를 제거하는 살균제의 사용법을 정확하게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식품이나 생활화학용품에 사용하는 ‘보존제’는 치명적인 인체 독성을 가진 ‘방부제’와 구별해야 한다. 보존제를 넣지 않은 물티슈는 유통과 사용 과정에서 부패해버린다. 보존제를 포기하면 훨씬 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플라스틱이 500년이 지나도 썩지 않아서 문제라는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자갈과 모래도 썩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갈이 환경을 망치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순식간에 썩어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환경에 더 큰 부담을 준다. 우리가 필요해서 만든 플라스틱은 우리 스스로 폐기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소비자의 얄팍한 주머니를 노리는 엉터리 마케팅 전략을 경계해야 한다. 마음이 약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황색 저널리즘이 쏟아내는 엉터리 정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화학물질의 위험을 지혜롭게 극복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와서 갑자기 화학물질을 포기해버려야 한다는 패배주의에 빠져들 이유가 없다.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화학자들이 더 무거운 사회적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